한국최초의 차 포니

국내에서 처음 달린 자동차는 ‘포드 A형 리무진’으로 고종 황제(1852~1919)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1903년 의전용으로 미국 공관을 통해 들여온 왔습니다.. 어차인 포드는 2인승으로 작고 소음이 심하여 황제가 차를 타는 것이 경망스럽다고 해서 궁궐의 구경거리로 전락했으며, 결국 러일전쟁의 와중에 소실되고 맙니다.
1955년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최초의 자동차가 출시됐는데 바로 시발입니다. 시발은 서울에서 자동차 정비업을 하던 국제 차량 제작의 창업자인 최무성의 3형제에 의해 개발돼 1955년 8월부터 1963년 5월까지 생산했습니다. 손으로 직접 만든 수제 승용차인 시발은 미군이 버리고 간 지프차량의 엔진과 변속기에 드럼통을 펴서 조립하는 식이었습니다. 주요 부품을 미국 차량에서 가져왔지만 국산차 원조로 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실린더 헤드 등 엔진 부품을 한국 기술자가 공작기계로 깎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약 50% 정도의 국산화를 이룬 시발은 이런 제조 방식 때문에 한 대를 만드는 데 4개월이 걸렸습니다.
시작이라는 의미의 한자어시발은 자동차 생산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시발은 지프형 6인승에 배기량 2195cc, 큰 엔진을 달고 최고 시속 80km로 달렸지만, 그렇게 빠르지는 않았습니다.
 시발은 1955년 10월에 열린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서 최우수 상품과 대통령상을 차지하면서 이목을 끌었고,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처음엔 8만 환 정도 하던 차량 가격이 1년 뒤에는 택시회사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30만 환대로 치솟았습니다. 선금을 받고 주문을 받은 선약금만도 1억 환이 넘었습니다. 심지어 프리미엄을 붙여 팔려고 부유층 부녀들 사이에는 ‘시발계’모임까지 등장했습니다. 1957년에는 한 대당 가격이 270만원 정도인 6기통 엔진을 달은 9인승 세단형 시발도 출시되었습니다. 이처럼 시발이 인기를 끌자 버스, 트럭, 트랙터 제작에도 손을 뻗었고, 시발 택시는 전국을 누비며 영업을 하였습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중고차 조립 수준에도 못 미치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정부 보조금이 끊기고, 일본산 승용차 수입이 허용되면서 시발은 추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결국 닛산의 블루버드가 ‘새나라 자동차’라는 이름으로 수입되면서 단종됩니다. 시발은 회사가 문을 닫을 때까지 약 3000여 대가량 팔렸습니다.
우리가 만든 고유의 모델이 등장하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더 걸렸습니다. 이전까지는 신진자동차 등에서 생산한 블루버드, 코로나, 크라운, 코티나 등은 외국 모델을 국내에서 조립한 것이었지만, 포니1은 국내제작 기술로 만들었습니다. 포니의 개발 이면에는 정주영(1915~2001) 전 현대그룹 회장의 불같은 의지가 있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1974년 국산차를 만들어 수출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선진국에서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2만여 개의 부품이 들어가는 종합 기계산업인 자동차를 후진국인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생산하겠다고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보란 듯이 포니(1300cc급)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포니의 개발로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두번째러 세계에서는 열여섯 번째로 고유 모델을 생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또 포니는 국산 1호 수출차로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판매 첫해에 1만 726대(대당 227만여 원)가 팔려나가 국내 시장의 43%가량을 휩쓸고, 6월에는 에콰도르에 6대를 처녀 수출하였습니다. 이렇게 불을 지핀 자동차 산업은 지속적으로 해외 시장을 개척하면서 1996년 사상 처음으로 수출 실적 100만 대를 돌파하였습니다. 포니를 성공시킨 현대차는 2004년 7월 누적 수출 대수 1000만 대 고지를 넘어섰습니다. 포니는 2009년 9월 디자인 전문가 대상 설문 조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한국 디자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날렵하고 모던한 스타일로 한국 상품 디자인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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